'밑바닥.' 국어사전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나 최하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밑바닥 인생'이라는 예처럼 분명 긍정적인 어감은 아닐 게다. 다른 사람에게 밑바닥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은 이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삶을 밑바닥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스스로 "밑바닥에서 변호사 생활을 25년간 하고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오는 25일 제47대 대한변협 회장으로 취임하는 위철환 변호사(55ㆍ사법연수원 18기) 가 그 주인공이다. 60년 만에 처음 치러진 직선제 선거에서 위 변호사는 '보통 변호사 시대'라는 슬로건으로 서울변호사회 출신들이 독식했던 변협 회장에 지방 변호사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화려한 경력을 가지지 못한 평범한 변호사, 지방에서 일해 온 변방 변호사, 소박함을 간직한 보통 변호사입니다"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가 밑바닥임을 자처하는 데는 인생 역정을 좇아가보면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회원들과 소통하는 변협, 인권과 정의의 파수꾼이 되는 변협을 만들겠다"는 위 변호사의 포부는 그의 행적 면면에 오롯이 살아 있다.위 변호사는 전남 장흥의 시골마을에서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중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한 그는 신문팔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가리지 않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어요. 친구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저는 인생공부를 한 거죠. '황야의 무법자'처럼 거침없이 세상 속으로 뛰어든 거예요."
어느 날 신문배달을 하던 중 무심코 불 켜진 창문을 보던 그는 전율을 느꼈다. 자신 또래의 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 가슴속에 묻어뒀던 공부에 대한 갈증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다. "꿈을 포기하지 말자,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전을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어요." 그는 곧바로 야간고교에 입학했다.
위 변호사의 뚝심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 아닐까. 부족한 잠으로 학교에서 항상 꾸벅꾸벅 졸았지만 그는 당당하게 서울교대에 합격했다. 졸업 후 교편을 잡았던 위 변호사는 공부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성균관대 법대 야간부에 입학했다.
교사 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던 위 변호사에게 다시 한번 '인생 역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장기 결석을 하던 제자와의 상담이 그를 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결석을 하는 이유를 물으니 아버지의 사업 실패 때문이라는 거예요. 아버지가 악덕거래처와 소송이 붙었는데 변변한 변호사조차 구할 수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상대가 전관을 동원하니 이겨야 할 싸움을 진 거예요."위 변호사는 "법원은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힘을 쓰면 정의가 바뀔 수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어요"라며 사법시험 도전 배경을 설명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본격적으로 시험 공부에 매달렸다. 야간고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잠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매일 출근 전 2시간, 퇴근 후 저녁 전 2시간, 저녁 후 2시간, 하루에 6시간씩 법전을 파고들었다. '주경야독' 3년 만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하지만 그의 '밑바닥 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온 사법연수원 동기들에 비해 학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위 변호사는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나이 어린 동기들과 경쟁하려니 힘들었어요. 동기들은 그야말로 '명품'이라고 할 수 있었죠"라고 겸연쩍게 말했다.
연수원을 수료했지만 변호사 개업은 만만치 않았다. 지연, 학연, 혈연으로 얽히고 전관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서울에서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서울에서 개업할 생각을 접은 위 변호사는 경기도 수원에 둥지를 틀었다. 위 변호사는 왜 변호사가 됐는지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변호사는 법률 수요에 비해 모자랐다. "변호사만 되면 돈, 명예, 권력을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던 때였어요. 그러다 보니 의뢰인들이 변호사에게 상담 받는 것은 바랄 수 없는 분위기였죠. 의뢰인들은 변호사 얼굴을 법정에서 처음 보는 게 일상화됐던 거죠."
당시 사법문화에 회의를 느낀 위 변호사는 의뢰인과의 대면 접촉을 원칙으로 삼았다. 소통을 강조하는 위 변호사의 철학은 이때부터 몸에 밴 듯하다. "의뢰인을 만나 사건 내용을 듣지 않고 어떻게 변론을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의뢰인이 사건이 마무리돼 나갈 때 '아, 거기에 가서 도움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게 열심히 일해 왔어요."
변호사가 한 사건, 한 사건에 집중하다 보니 수임 건수는 신통치 않았다. '남들 하는 대로 하면 쉽게 사건을 수임할 수 있는데 왜 어려운 길을 가려 하느냐'는 핀잔도 수없이 들었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다졌다. 20여 년이라는 세월을 관행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위 변호사에게 관행을 깨뜨려야 한다는 과제는 어느새 소명이 됐다. 간선제였던 변협 회장 선거를 직선제로 전환시킨 것도 이러한 신념에서 비롯됐다.
위 변호사는 "변호사들의 단체가 간선제로 회장을 선출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독재정권 시절 '체육관 선거'를 비판했던 변호사들이 간선제를 고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라고 직선제 주장의 배경을 설명했다.
위 변호사는 직선제 실현을 위해 자신이 속한 경기변호사회에서 시작했다. 지방 변호사회 역시 고위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이 돌아가면서 출마하고 대의원들이 추인하는 형식이었다. 지역을 누비며 대의원들을 설득한 결과 직선제로 회칙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선거에 출마한 위 변호사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선됐다.
"지지율 5%도 안 되는 상태에서 선거운동을 시작했어요. 진심은 통한다고 했나요? 발로 누비며 제 진심을 회원들에게 보였고 회원들은 당선으로 화답했어요."
위 변호사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대한변협도 바꾸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서울회 변호사들이 도맡았던 회장 선거 방식을 뜯어고쳐야 변협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방 변호사들은 사실상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을 정도로 소외돼 왔어요"라고 말할 때 그의 얼굴에서 지방 변호사들의 애환이 읽혔다.
어느 조직이나 기득권을 깨뜨리는 건 녹록지 않다. 서울회 중심으로 돌아가는 변협에서 '평등'을 주장하는 위 변호사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변협 부회장 임기 4년 동안 그는 줄기차게 직선제를 주장했다.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지방 변호사회 소속 대의원들을 똘똘 뭉치게 했고, 서울에서도 직선제가 대세임을 각인시켰다. 그렇게 4년간의 투쟁을 통해 직선제로 회칙을 개정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일궈놓은 변협 회장 선거전에 뛰어든 위 변호사는 '역전의 명수'라 부를 만하다. 4명이 출마한 선거에서 그는 가장 늦게 준비했고, 조직도 인맥도 부족했다. 다른 후보들의 물량 공세와 네거티브전에서 그는 '일엽편주' 같은 신세였다.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선거운동을 해갔다. 지방 변호사이지만 변호사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말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나온 게 '보통 변호사'라는 슬로건이었다. 청년변호사, 로펌의 나이 어린 변호사, 수임이 적어 가난한 변호사에게 희망을 주자는 것이다. 위 변호사는 "지방 변호사가 출마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더라고요. 사표(死票)가 될 것 같아 찍어주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어요"라며 험난했던 선거과정을 토로했다.이번에도 그의 진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결과 결선투표 끝에 변협 회장에 당선됐다. 전관, 서울회, 서울대 출신이 아닌 '3비(非) 변호사'가 변호사단체의 수장이 된 것이다. 위 변호사는 "회원이 중심이 되는 변협, 회원들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변협을 만들겠다"고 말한다. 매년 2000여 명씩 배출되는 변호사들의 공급 과잉으로 변호사 사회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내몰렸다. 그는 "결국 일자리 만들기만이 해법"이라고 간단 명료하게 말한다.
그는 민사합의사건에서도 변호사를 선임하는 강제주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부, 기업, 지자체에 변호사들이 진출할 수 있는 문을 더욱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준법감시인 요건 완화, 입법담당관 신설 등도 방안으로 제시했다. 위 변호사는 "고급 인력이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을 보는 게 가슴 아파요. 제가 밑바닥에 있어 봤으니 그들의 아픔이 느껴져요"라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 변호사는 취임 후 정치권을 상대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는 입장이다. 필요하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만날 계획이다. 그가 변호사들의 일자리에 정성을 쏟는 데는 법률시장의 안정이라는 측면도 있다. 그는 "법률시장이 안정돼야 공익도 있는 법이에요. 강직하게 살려고 해도 배가 고프면 빵이라도 한 조각 훔쳐먹는 게 인지상정이잖아요"라고 말했다.
위 변호사는 변협의 폐쇄적인 문화 일신에도 진력할 예정이다. 소수만의 문화로 인해 회원들의 무관심, 불신이 컸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이번에도 소통만이 해답이라는 생각이다. 경기변호사회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회원들의 의견을 힘닿는 데까지 수렴한다는 계획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성화를 통해 회원들의 참여 공간도 넓히려 한다. 그는 "임금님도 가난 구제를 못 하는데 협회에서 회원들에게 사건을 갖다준다는 공약을 내세우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희망을 주고 어떤 정책을 만들지 머리를 맞대는 게 힘이 되는 거예요"라며 기본에 충실한 변협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밑바닥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자신보다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 소통이 문제해결의 시작이라고 믿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 위 변호사가 만들어갈 변협의 길을 기대해본다.
■ 非서울대·非전관·非서울변호사회…60년 관행 깼다변호사업계에 개혁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달 잇따라 치러진 대한변호사협회와 서울지방변호사회 선거에서 회원들은 대다수의 변호사들을 대표할 '보다 평범하고' '보다 젊은' 후보를 선택했다.
그 신호탄은 지난달 21일 제47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에 위철환 변호사(55ㆍ사법연수원 18기)가 선출된 것이다. 사상 첫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그는 협회 설립 60년 만에 처음으로 지방 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로 회장직에 올랐다.
일개 협회장 선거에 웬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지금껏 대한변협 회장의 진입장벽은 견고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사회 엘리트로 분류되는 변호사들의 단체장인 만큼 서울을 기반으로 한 판ㆍ검사 출신 변호사들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3비(非)(비서울대ㆍ비전관ㆍ비서울변호사회) 출신의 위 변호사가 최초로 회장에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위 신임 회장은 당선 직후 '전관도, 서울 출신도 아닌' 자신이 뽑혀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 He is…
△1958년 전남 장흥 출생 △서울 중동고 졸업 △서울교육대학 학사 △서울 청덕ㆍ안암초등학교 교사 △성균관대학교 법학사 △제28회 사법시험 합격 △전 제18대 수원지방변호사회 회장 △현 제19대 경기중앙지방변호사협회 회장 △현 제46대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
[장원주 기자 / 이현정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